역사적인물

김구

1649(인조 27)~1704(숙종 30)

  • 조선 후기의 문신.
  • 본관은 청풍. 호는 관복제.
  • 아버지는 관찰사였다.

1669년(현종 10) 사마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춘당대문과에 장원하여, 전적과 각 조의 낭관을 거쳐, 사헌부와 사간원에 있을 때, 노론.소론의 격렬한 대립을 완화하기 위한 만언에 가까운 시무소를 올려 일반의 찬탄을 받았으며,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는 데 힘썼다. 경연관.수찬.승지 등을 거쳐 황해도.충청도.전라도.평안도의 4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대사간을 거쳐 1697년 강화유수로서 장녕전을 경영한 공으로 가자되었으나, 오도일.이광좌등으로부터 흉년으로 모든 역사를 정지시켰는데도 내전을 통해 나온 명을 받들어 집을 지었다 하여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어 판결사에 있으면서 노산군(단종)의 복위를 극력 주장하여 숙종으로 하여금 단종의 위를 추복하게 하였고, 아울러 단종비 신씨의 묘를 능으로 추봉하고 능역을 감독하여 그 공으로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이어 육조의 판서를 거쳐, 1703년 우의정이 되었다.
임금의 위엄에 굽히지 않았고, 의리에 따라 처신하였으므로 임금의 총애와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병서와 도가류에 정통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가 힘찼다.
글씨로는 고성에 있는 <백천교중병비>와 선사에 있는 <김수신도비>가 있다.
시호는 충헌이다.
만년에 송파구 방이동 몽촌토성 안에 거주하였는데, 광주유수도 이곳까지 찾아와 인사드리고, 비록 죄를 지은 자라도 이곳에 들어오면 그의 허락을 얻은 뒤에야 체포할 수 있는 등 이 일대에 큰 세력을 갖고 있었다 한다.
묘도 몽촌토성내에 있는데, 묘에는 곡장을 두르고 장명등과 문인석이 각 1쌍씩 있다.
묘 앞에는 영조 19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이의현이 짓고 서명균이 쓴 이 비는 「충헌 김공신도비」라 되어 있다.
화강암의 용대위에 조석의 비신이 있으며 그 위에 역시 같은 화강암의 가담석이 얹혀져 있다.

김상헌

1570(선조 3)~1652(효종 3)

  • 조선 인조.효종 상신 본관은 안동.
  • 자는 숙도, 호는 청음.석실산인(중년 이후 양주 석실에 퇴귀해 있으면서 사용).서간노인(만년에 안동에 은거하면서 사용).
  • 서울출생

돈녕부도정 극효의 아들이며, 우의정 상용의 동생이다. 3세때 큰아버지인 현감 대효에게 출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세력의 보합위주정치에 반대 시비와 선악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함으로써 서인 청서파의 영수가 되었다.
1635년 대사헌으로 재기용되자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시설의 확충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예조판서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보필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최명길등의 주화론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경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었다.
잡혀갈 때 남긴 시조가 그의 애국충절을 말해준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시문과 조천록.남차록.청평록.설교집.남한기략 등으로 구성된 <청음전집> 40여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정이다.

서거정

1420(세종 210)~1488(성종 19)

  •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달성. 자는 강중, 초자는 자원, 호는 사가정, 증조부는 호조전서이고, 아버지는 목사 미성이며, 어머니는 권근의 딸이다.

학문이 매우 넓어서 천문.지리.의약.점술.성명.풍수에까지 관통하였으며,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詩에 능하였다. 그의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사가집>이 전하며, 공동찬집으로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국선>, <경국대전>, <연주시격언해>가 있고, 개인저술로서는 <역대연표>, <동인시화>, <태평한화골계전>, <필원잡기>, <동인시문>등이 있다.
광주의 구암서원에 제향되었다가 대구로 옮겨졌다.
시호는 문충이다.
50세 전후에 자신도 한강변의 별야겸 우거지를 마련하였다.
처음에는 광진 즉 아차산하 지금 광장동에 농장을 마련하고 수시로 나와 심신을 휴양하며 강변풍물을 시로 읊었다.
그후 죽음에 이르러서 후손들에게 자신의 묘 또한 이곳에서 멀지않은 현 방이동 근처에 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대한제국 말까지 이곳 방이동(안산)에 묘가 있었는데 일제의 도시계획 등으로 인해 후손들이 구암서원 근방의 선산으로 이장해 갔다.

어효첨

1405~1475

  • 조선초기 직제학 어변갑의 아들, 자는 만종, 호는 귀천, 시호는 문효이며 본관은 함종이다.

그는 세종12년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한후 예조참의를 거쳐 이조, 호조, 병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냈고 세조9년에는 이조판서, 성종5년에는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의 성품은 순결하고 학문에 조예가 깊어 음양풍수등의 미신을 적극 배척한 인물로 유명하였으며 그는 아버지 장례때에도 지관을 부르지 않았다고 <海東名臣錄>에 기록되어 있다.
함종어씨의 가문들은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수 없다’하여 魚氏家수백기의 묘들이 따가운 햇볕을 피해 서늘한 북쪽이나 서쪽을 향하고 있고 또한 이들의 집성촌 역시 남향이 아닌 북향 또는 서향으로 자리잡는 특별한 전통을 이어 내려오고 있다.저서는 예기일초(禮記日抄)가 있다.

오달제

1609(광해군 1)~1637(인조 15)

  • 병자호란 때 삼학사의 한 사람.
  • 본관은 해주. 자는 이휘, 호는 추담. 윤해의 아들이다.

19세에 사마시에 합격, 1634년(인조 12) 26세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전적.병조좌랑.시강원사서.정언.지평.수찬을 거쳐, 1636년에 부교리가 되었다.
이때 후금의 세력이 날로 커져 칭제건원하고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을 무섭게 위협하여 왔다.
이에 화친을 위하여 주화파 최명길 등의 주장으로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임금을 속이고 삼사의 공의를 위협, 제지하여 임의로 사신을 보낸 최명길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인조가 청군에 항복하게 되자, 청나라측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척화론자에게 돌려 이들을 찾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윤집과 더불어 자진하여 척화론자로 나서서 적진에 잡혀가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적장 용골대는 그의 뜻을 꺾기 위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라고 회유하기도 하고, 또 협박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라고 하고 저들의 말을 쫓으면 오랑캐가 되고 마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항변하였다.
마침내 심양성 서문 밖에서 윤집.홍익한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학사라고 하여 그들의 절개와 충성을 높이 기리게 되었다.
그는 묵매화에도 뛰어났는데, 어몽룡.조속.허목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명나라의 묵매화풍의 영향을받아 구도가 조금은 번잡한 감을 준다.
그의 그림은 <묵매도> 2점이 전하며, 이러한 구도의 묵매화는 뒤의 조지운.홍수주.박동진.조희룡.이공우 등의 묵매화에 영향을 주었다.
좌승지.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 남한산성의 현절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열서원, 영천의 장엄서원, 고령의 운천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렬공유고>가 있다. 시호는 충렬이다.

윤집

1606(선조 39)~1637(인조 15)

  • 조선 후기의 문신.
  • 본관은 남원. 자는 성백, 호는 임계.고산.현감 형갑의 아들이며, 남양부사 계의 아우이다.

1627(인조 5) 22세에 생원이 되고 1631년(인조 9)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에 설서가 되었으며 1636년(인조 14)에 이조정랑.부교리에 이어 교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국왕과 조정 대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난을 피하였으나 청병에게 산성이 포위되어 정세가 극히 불리하게 되었다.
최명길 등이 화의로 위기를 극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오달제.홍익한 등과 함께 화친의 사신을 보내자고 주장하는 최명길의 목을 벨 것을 청하였으며, 최명길이 국왕의 뜻을 움직여 화친의 일을 성립시키고자 입대하여 승지와 사관을 물리치도록 청하자 이를 규탄하는 극렬한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옛날 화친을 주장하여 사필의 베임을 피할 수 없었던 주회와 같은 대간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지 못하였다고 극렬한 말로 규탄하는 한편, 국왕이 대연을 꺼리지 않고 오직 사특한 의논만을 옹호하고 간사한 신하만을 의지하면 마침내 나라를 잃어버리고 만다고 경고하였다.
화의가 성립되자 청나라측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하니 그는 오달제와 더불어 소를 올려 자진하여 척화론자로 나섰다.
청병에 의하여 끌려갈 때도 조금도 절개를 굽히지 아니하여 청병이 오히려 감복하여 존경하였다고 한다.
청나라에서 고문과 회유 등으로 그의 뜻을 돌리려 하였으나 몸을 굽히는 굴복의 모욕은 죽는 것보다 도리어 더한 모욕이라며 끝내 굴하지 않고 항변하다 마침내 심양성 서문밖에 끌려가 사형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오달제.홍익한과 더불어 삼학사라고 이른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 남한산성의 현절사, 강화의 충렬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렬서원, 영천의 장엄서원, 고령의 운천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이다.

이집

1314(충숙왕 1)~1387(우왕 3)

  • 고려 말기의 학자.문인.
  • 본관은 광주, 초명은 원령, 자는 호연, 호는 둔촌, 광주 향리 당의 아들로 광주목에서 나서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므로써 이색.정몽주.이숭인등과 서로 교유하였다.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기로 명성이 높았다. 1368(공민왕 17) 신돈을 탄핵하다가 신돈의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자, 가족과 함께 경상도 영천 최원도의 집으로 도피하여 고생 끝에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개경으로 돌아와 판전교사사에 임명되었으나 출세할 뜻이 없어 곧 사직하고, 광주땅 안둔골에 집을 짓고 전야에 묻혀 살면서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
후손에서 5명의 정승, 6명의 판서, 7명의 공신이 나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광주목과 여주목의 인물조에 소개되고 있는 이지직, 이지강, 이지유, 이장손, 이인손, 이예손, 이극배, 이극감, 이극중, 이극균, 이세필, 이세광, 이세우, 이세좌 등이 그러한 둔촌인파이다.
광주 귀암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 <둔촌유고>가 있다.
현 강동구 둔촌동은 그가 이곳에서 일시 거주하였으므로 그의 호를 따서 이름한 것이며, 둔촌동 522-6의 앞길에서 길동 4거리를 경유 명일동 산 11-4의 앞길까지 이르는 폭 25.5m, 길이 3,870m의 길을 둔촌로라 이름한 것은 이 때문이다.
강동구 둔촌동에 거주했던 인물을 송파구 인물편에 실음은 이곳이 모두 옛날 광주지역이었으며, 이집은 광주이씨의 시조가 되기 때문에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

조운홀

1332(충숙왕 복위 1)~1404(태종 4)

  •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 본관은 풍양. 평장사 맹(孟)의 31대손이다.

이인복의 문인이며, 1357년(공민왕 6)에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서기가 되고, 합문사인을 거쳐서 1363년에 2등공신이 되었다.
이듬해 국자감직강이 되었고 이어서 전라·서해·양광의 삼도안렴사를 지냈다.
1374년 전법총랑으로 사직하고, 상주 노음산 기슭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석간누하옹이라고 하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소를 타고 다녔다.
이때 <기우도찬>,<석간가>등의 시를 지었다. 1377년(우왕 3) 다시 등용되어서 판전교사사로 있다가 1380년에 사임하고, 광주 고원강촌(몽촌)으로 퇴거하였다. 그곳에서 판교원,사평원을 중건하여 원주가 되고 공사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다.은둔생활 8년째인 1388년(우왕 14) 전리판서로 기용되었고, 창왕이 즉위하자 서해도 도관찰사로 나가 왜구를 토벌하였다.
그후 계림부윤, 강릉부사 등을 역임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었다.
조선조 때 검교정당문학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퇴하고 고원강촌에 은거하여 지내다가 태종4년 73세로 자신의 묘지문을 손수 지어놓고 여생을 마쳤다.
몽촌에 일거하면서 그는 밭에 나가 농사지어 생계를 유지하고 아정에 나가 강산풍월을 읊으며 소를 타고 가까운 곳에 있는 정금원, 광진원을 왕래하면서 행여들을 돌보아 주었다.

최명길

1586(선조 19)~1647(인조 25)

  • 조선 중기의 문신.
  • 본관은 전주. 자는 자겸, 호는 지천.창랑.
  • 아버지는 영홍부사 기남이며, 어머니는 참판 유영립의 딸이다.

1614년(광해군6)에 병조좌랑,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에 봉하여졌으며, 이어 이조참판이 되어 비변사 유사당상, 홍문관 부제학, 사한부 대사헌 등을 거쳤다.
1632년 이조판서, 1635년 호조판서,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론을 펴 극렬한 비판을 받았다.
1642년 영의정을 지냈으며, 1645년 인조를 보필하다 죽었다.
그런데 그가 심양에 잡혀가서 비록 갇힌 몸이 되었으나 늠름한 태도로 시종일관 비굴한 빛이 없었다.
이때에 김상헌은 그의 늠름한 태도에 “공의 주화가 오로지 나라를 위한 충성에서 비롯한 것임”을 비로소 알고 마음으로 탄복하였다.
그후로 김상헌은 자손들에게 최공 집안과 대대로 세의를 도모하라는 유언까지 남기었다고 전한다.
성리학과 문장에도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으며, 글씨에 있어서도 동기창제로 이름이 있었다.
저서로는 <지천집> 19권과 <지천주차> 2책 등이 있다.
박천의 지천사에 제향. 시호는 문충이다.

홍익한

1586(선조 19)~1637(인조 15)

  • 오달제.윤집과 더불어 이른바 “병자 삼학사”의 한 사람.
  • 본관은 남양, 자는 백승, 호는 화포.운옹. 찬성 숙의 현손으로, 진사 이성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김림의 딸이며, 백부인 교위 대성에게 입양되었다.

이정구의 문인이다.
1615년(광해군 7) 생원이 되고,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서를 거쳐, 1635년 성균관 장령이 되었다.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시하는 모욕적인 조건을 내걸고 사신을 보내오자, 상소하여 제호를 참칭한 죄를 문책하고 그 사신들을 죽임으로써 모욕을 씻자고 주장하였다.
마침내 이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미처 강화로 피난가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는 최명길 등의 화의론을 극구 반대하였는데, 이 난으로 그의 두 아들과 사위가 모두 적의 칼에 죽었고, 아내와 며느리는 적에게 붙들렸으나 몸을 깨끗이 보존하고자 자결하였으며, 늙은 어머니와 딸 하나만이 살아 남았다.
이듬해 화의가 성립되었는데, 조약이 거론될 때, 김상헌.오달제.김집 등과 척화를 주장하였다.
강화체결 이후 조정의 권유로 청군의 화를 피하기 위하여 평양부서윤으로 나갔으나, 청나라의 강요로 화친을 배척한 사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오달제.운집과 함께 청나라로 잡혀갔다.
그곳에 붙들려갔어도 문초하던 청장 용골대에게 “작년 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소를 올려 너의 머리를 베자고 청한 것은 나 한사람 뿐이다.” 하였고, 갖은 협박과 유혹에도 끝내 굽히지 않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그를 비롯한 삼학사가 살해된 정확한 날짜도 모르고 오래도록 감추어져 오다가 효종 때에 홍익한에게 도승지, 윤집에 부제학, 오달제에 좌승지를 추증하게 하였고, 숙종 19년(1663)에는 삼학사에게 영의정이 추증되어 그 절개를 기리게 되었다.광주의 현절사, 강화의 충렬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렬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영천의 잠엄서원, 고령의 운천서원, 평양의 서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화포집>, <북행록>, <서정록>이 있다.
시호는 충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