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의 설화1920년대의 잠실리
설화는 신화 · 전설 · 민담으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신화는 전승자가 진실되고 신성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이야기라고 본다면, 전설은 전승자가 신성하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으나 진실된다고 믿고 제로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전설의 세계는 일상적 경험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진실성이 끊임없이 의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심에서 표현된 말이 '어디까지나 사실이 아니고 전설일 따름이다'라는 말로 얼버무립니다.
이 전설은 사실로서의 근거를 부인할 수 없도록 그 증거물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의심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반면 민담인 경우는 전승자가 신성하거나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꾸며낸 것으로 흥미를 주기 위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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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동 가까이 흐르는 내 옆에 돌로 된 거북 두 개와 비석 한 개가 있다. 이 돌거북과 비석은 모두 중국에서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거북과 비석을 가져올 때는 각각 두 개씩 배에 싣고 오다가 비석 한 개는 바다에 빠뜨려서 비석 한 개와 거북 두 개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한다. 한 거북 위에는 비석을 세웠는데 다른 하나는 비석이 세워져 있지 않았다. 거북과 비석이 있는 곳에는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고 사람을 두어서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비석이 세워져 있지 않은 거북이는 밤이나 비가 오면 슬프게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당지기는 이곳에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그 뒤부터 거북이는 울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이 바뀌자 사당지기도 두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그 뒤부터 큰 홍수가 나면 제방이 무너지고 냇물은 거북이 있는 쪽으로 가까이 흐르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거북이가 물속으로 파묻히게 되면 이 세상은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다 없어지게 된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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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3백 수십 년 전 조선 인조 때 경기도 광주 유수 이서는 남한산성의 축성공사를 둘로 나누어 남쪽을 부하 이회에게, 북쪽을 중(僧) 벽암에게 각각 분담시켰다. 이회는 그날부터 낮과 밤, 일심 단성으로 오로지 충성에만 노력하여 돌 하나, 흙 한 줌에도 정성을 들여 침식을 잊다시피 몰두하였었다. 그러는 중에 축성자금이 부족하였으므로 마침내 자기 사재까지 전부 던지었다. 그렇게 해도 공사를 준공하기에는 자금이 부족하여 하루 이틀 공사는 늦어만 가고 있었다. 그 반면 벽암의 공사는 착착 진행되어서 기일 안에 준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가에서 받은 공사비 중에서 남는 금액까지도 관가에 반납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정직한 이회는 점점 의심을 받게 되었다. '이회가 사리사욕을 탐하고 주색에 빠져서 공사를 게을리한다' 는 벽암의 터무니없는 모함에 의하여 관가에서는 벽암의 말만 믿고 이회를 서장대에서 참수형을 시켰다. 형을 집행하기 전에 그는 조금도 슬픈 기색이 없이「신이 죽기는 합니다만 죽은 순간 한 마리의 매가 날아올 것이나 매가 날아오지 않으면 신의 죄는 죽어 마땅하되 매가 날아오면 죄가 없는 줄 아십시오」라고 말하였으나 윗자리에 앉은 이서는 이 말을 들은 척도 않고 빨리 처형하라고 명을 내렸다. 곧 이어 번쩍이는 칼날에 비참하게도 이회의 목은 땅에 떨어졌다. 그때 피가 흐르는 목 위로 한 마리의 매가 날아와서 이회의 시체를 맴돌고 수어장대 근처 바위 위에 앉아 무서운 눈초리로 군중을 흘겨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것을 본 군중들은 이상히 여겨 그 매가 앉아있던 바위를 쫓아가 보니 매는 없고 다만 발자국만 남아 있었다. 이 뒤부터 이 바위를 매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관가에서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실지조사를 해본 결과 벽암이 쌓은 성은 한 곳도 정성 들인 곳이 없이 허술하였으나 이회가 쌓은 성은 금성철벽같이 견고하였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관가에서는 많은 돈을 하사하여 서장대 근처에 사당을 세워 청량당이라 하고 그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한편 이회의 부인 송씨는 남편이 축성비가 부족해서 고심하는 것을 보고 하루는 그가 남편에게 「제가 돌아다니며 기부금을 받아 축성비에 보태겠습니다」하고는 집을 나간 지 여러 달 만에 많은 양의 기부금을 얻어서 배에 싣고 세밭나루 (三田渡)에 다다랐을 때 뜻밖에도 남편이 참형을 당했다는 슬픈 소식을 듣자 통분하여 싣고 온 쌀을 모두 강물에 던져버리고 자신도 한강에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다. 이 뒤부터 이 강을 쌀섬여울(米石灘)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송씨가 강에 뛰어들어 죽은 뒤부터 안개가 낀 날이나 어두컴컴해질 무렵에 배를 타고 이 쌀여울을 지날 때는 머리를 풀어 헤친 여인의 모습과 곡성이 들리곤 하였다.
사공들이 여인의 모습에 홀려 배를 몰다보면 삼성동앞 어린애같이 생긴 무동도에 부딪혀 파선하여 익사하곤 하였다. 그래서 삼전리 사람들은 이같은 불행한 일이 자주 발생하는 것은 송씨 부인의 원혼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상의끝에 쌀섬여울 에서 100m 동쪽 강변에 부군당을 세워놓고 송씨부인을 제사 지내기로 하였다. 그 뒤부터 배가 파선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관가에서는 그 부인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강가 언덕위에 사당(하주당)을 세워 영을 위로하였다고 한다. -
이동 서남쪽 고개에 10여 년 전까지도 상여막이 있었고 그 옆에 글씨가 보이지 않는 무문비석이 있었다.
이 상여막에는 장정 30여 명이 메어야 하는 큰 상여가 있었다.
이 부근에 무문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이 마을에 신혼부부가 살았는데 어느 날 신랑이 사업을 하기 위해 먼 곳으로 떠났으나 오래도록 아무 소식이 없었다. 이에 새댁은 날마다 동구 밖에 나가 신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이 몇 년이 흘렀다.
이처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단념하지 않고 기다리던 새댁은 기어코 이곳에서 지쳐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자 이를 측은히 생각하고 일변 갸륵하게 생각한 동민들이 장례를 정성껏 치러준 뒤 새댁의 정절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이곳에 비석을 세웠다.
이러한 애절한 사연이 깃든 이 비석은 오랜 세월동안 풍우에 씻겨 비문조차 보이지 않게 되자 무문비라고 불렸다. -
지금부터 약 3백여 년전 병자년 난리 때 인조 임금은 근신 몇 사람과 함께 서울을 빠져나와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산기슭까지 오르자 몸에 피로가 쌓여 잘 걷지 못하였다.
마침 근처에서 나무를 하고 있던 서흔남이라는 한 나무꾼이 이 광경을 보고 곧장 달려와 인조 임금을 등에 업고 성안으로 올라갔다.
인조임금은 서흔남이라는 그 나무꾼의 공을 가상히 여기시고 「네가 소망하는 것을 들어주겠으니 말하라」 하였다.
무지한 그는 왕이 입고 계시는 금빛 찬란한 곤룡포가 귀하게 보였다.
그래서 그 옷을 소망한다고 아뢰었다.
인조임금은 곤룡포를 하사하였다.
그 뒤 서흔남이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곤룡포를 시체와 함께 병풍산에 묻었는데, 그 공으로 해서 별군관이란 벼슬을 얻게 되었다.
그 후 대소 관원들이 그 무덤 앞을 지날 때에는 곤룡포가 묻혀 있기 때문에 반드시 말에서 내렸다고 전한다. -
오봉산은 송파에서 조금 떨어진 동네에 있었습니다. 오봉산은 어떻게 해서 오봉산이라고 하는고 하니 그 몽고 사람이 조선을 빼앗아가지고 조선의 임금한테 항복을 받아야 할 텐데, 조선의 임금님이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고 없으니까 몽고 사람들이 여기 송파강에서 남한산성을 향해 포를 쏘는데, 남한산성 안에 있는 임금님과 백성들이 다 죽으라고 포를 쏘았나 봐요. 그리고 한강 물줄기를 산성을 향해 돌렸는데 물이 개울로 흘러나가지 산성 안에 물이 차겠어요? 나중에 남한산성에 먹을 것이 없어서 임금님이 내려와 항복을 하는데, 몽고인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오봉산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항복을 받아라.” 그 오봉산에서 항복을 받으려고 오봉산을 찾으니까 이 바닥에는 오봉산이 없거든요. 저 과천 쪽에 오봉산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과천지역에서도 오봉산을 못 찾자 도로 여기로 와서 항복을 받으려고, 그 오봉산을 쌓았대요. 그때 쌓은 오봉산은 석촌호수 건너 백제초기 적석총 고분 지역에 있었대요. 지금 사람들은 그 오봉산이 옛날 고분이라고들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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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일장산(남한산) 중턱에 백제시조 온조왕을 치제하는 제전이 있는데 이것은 조선후기 인조 16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백제 시조 묘(廟)에 조선왕조의 신하가 배위 된데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밤 인조 임금이 꿈을 꾸었는데 온조왕이 찾아와서 「조를 세워 주신 데 대해 참으로 기쁘게 생각하오」 먼저 감사의 뜻을 말한 다음 「나만이 이 조에 있는 것은 좀 적적하니 청컨대 당신의 신하 이서를 나에게 주실 수 없습니까?」하였다. 인조왕은 「그것은 쉬운 일이오」하고 쾌히 승낙하자 깨어보니 꿈이었다. 인조 임금이 이튿날 아침에 침전에서 일어나자 광주유수 이서가 어젯밤 별세하였다고 신하가 아뢰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 임금은 「이서는 온조왕이 데리고 간 것이 틀림이 없다」하고 온조왕의 배위로 종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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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프라자아파트가 들어선 곳은 거여동 산 2번지 지역이지만 전일에는 오금동 지역으로 임경업 장군 증조부의 묘소가 있었으나 5.16 이후 이장되었다. 이 묘소는 「매화낙지형」 명당이기 때문에 이로 인해 임경업 장군이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부터 약 5백년전, 서울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지내는 한 총각이 있었다. 그는 가세가 빈한하고 글을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다만 「임도령」이라 불렀다. 어느 해 이른 봄날이었다. 임도령은 끼니를 이을 길이 없어 생각다 못해 광주에 산다는 친척집으로 식량을 구하러 떠났다. 그렇다고 친척집을 잘 아는 것도 아니요 다만 어머니 말씀만 듣고 어림짐작으로 길을 떠난 것이다. 그는 광나루에서 한강을 나룻배로 건너 남한산 쪽을 향하여 걸었다. 들판을 지나고 언덕을 넘어 여기저기서 길을 물어가며 남한산 기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산중에서 길을 찾다보니 이 골짜기도 그 골짜기 같고 그 골짜기도 이 골짜기 같아 지친 몸에 방향을 잘 알 수 없게 되었다. 해는 지고 길은 희미한데 하늘에서 먹구름이 일어나더니 비바람마저 몰아쳤다. 임도령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날은 어둡고 길은 험하고 몸은 지칠대로 지쳤다. 다시 왔던 길을 찾아 내려가려 하였지만 그것도 어디가 어디인지를 알수 없었으니 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저만큼 불빛이 반짝거리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임도령은 일말의 희망을 그 불빛에 걸고 거의 기다시피 하여 찾아가니 거기에는 자그마한 집 한 채가 있었다. 주위는 조용하고 인기척이 없었다. 임도령은 마음 한 구석에 의심이 나기도 하였지만 용기를 내어 주인을 불렀다.
그런데 방문을 열고 나타나는 사람은 뜻밖에 아리따운 묘령의 처녀가 아닌가? 이같이 깊은 산중에 처녀 혼자만이 살고 있다는 것도 괴이한 일인데 그 처녀는 뛰어난 미모에 음성도 고운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처녀는 밤이 깊고 날씨가 궂은데 어떻게 찾아왔느냐고 묻자 임도령은 자기의 신분과 길을 잃은 사연을 말하니 처녀는 자기 이름은 용녀라고 말하고 이곳에 혼자 산다고 하면서 들어오기를 권하는 것이었다.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은 임도령은 용녀의 인도로 방안에 들어갔는데 방안이 예사 촌가 같지 않고 자개가구와 꽃병풍등 화려한 장식이 한층 정신을 황홀하게 하였다. 그러나 임도령은 주인 처녀의 안내대로 방안으로 들어가 수건으로 비에 젖은 몸을 닦고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처녀는 태연하고 다정한 음성으로 오늘밤의 만남이 모두 옥황상제께서 점지하여 주신 인연이라고 하며 은근하게 대하자 임도령은 의외의 일에 정신이 황홀하였다. 용녀는 밖으로 나가더니 진수성찬을 차려가지고 들어와서 음식을 권하며 손수 술을 따라 주기도 하였다. 임도령은 의심스러운 점도 없지 않았지만 처녀의 친절과 아름다운 용모에 끌려 술과 음식을 들게 되었다. 밥상을 물리고 두 사람은 원앙금침 위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임도령에게는 참으로 뜻밖에 얻은 행복이요 호사가 아닐 수 없었다. 미모의 용녀와 하룻밤을 지낸 임도령은 이튿날 그대로 길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그 처녀를 혼자두고 떠나가는 마음이 아쉽기 이를 데 없었다. 임도령은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다시 지난 밤을 지내던 곳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집도 용녀도 간 곳이 없고 다만 한 그루의 고목이 비스듬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한 여인이 서 있는데 그녀는 곧 자기와 어젯밤을 지냈던 아리따운 처녀였다. 그러나 그 여인은 쌀쌀하고 냉혹한 태도로 임도령을 노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어 「이젠 사정을 다 말하겠소. 나는 5백년 묵은 암구렁이요 세상의 남자인 당신의 힘으로 이제 나는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이 당신의 덕입니다.
아무쪼록 평안히 계시오.」하고는 무엇에 빨리듯 하늘로 올라갔다. 점점 작아져 가는 용녀를 임도령은 미친듯이 불렀다. 그러나 용녀는 하늘높이 사라져만 가는 것이었다. 이때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렸다. 「서방님, 잠시 후에는 제가 올라간 자리에 비늘 세 개가 떨어질 것입니다. 그 비늘이 떨어진 자리에 서방님댁 묘자리를 쓰십시오. 그러면 서방님 자손에 유명한 장수가 꼭 나올 것입니다. 서방님-.」용녀의 모습은 영원히 사라지고 하늘에서 비늘 세 개가 떨어지더니 매화나무 세 그루로 변했다. 임도령으로서는 희한한 일이요 또 그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집에 돌아가 어머니에게 말씀드리고 아버지의 산소를 그 매화나무가 있는 자리로 이장하니 이것이 매화낙지형 명당이다. 병자호란때의 명장 임경업장군이 이 매화낙지형 명당의 발복으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근처에는 매화낙지형 명당의 발복으로 태어난 임경업장군이 투구를 썼다는 투구봉, 농을 열고 갑옷을 꺼내 입었다는 개농리, 용마를 얻어 탔다는 마산 등의 지명이 전해온다. -
송파동에는 백제초에 금슬 좋은 부부인 도미와 아랑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부터 약 1800년전 삼국시대 초기 백제의 제4대 개루왕(128~165) 때 백제의 서울 위례성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에 신혼의 도미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 도미는 목수로서 비록 지체는 보잘것 없지만 사람됨이 준수하고 의리를 알았으며 아내 아랑은 용모가 아름답고 언행에 품위가 있으니 두 사람은 의좋은 부부로 품행있는 젊은 남녀로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행복한 그들 부부에게 뜻밖의 불행이 닥쳐왔다. 즉, 아랑의 뛰어난 미모가 백제 온 나라 안에 퍼져 모르는 이가 없게 되니 이 소문이 여색을 좋아하는 개루왕의 귀에까지 들렸다. 개루왕은 아랑을 보고자 그녀를 부르게 했다. 그러나 아랑은 왕이 보낸 사자에게 벼루에 먹을 갈아 왕에게 올리는 글을 썼다. 「왕은 백성의 부모라 어찌 부르시는 명을 거역하오리까마는 소첩은 남편이 있는 몸이라 남편의 허락이 없이는 부르시는 왕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초조하게 기다리던 개루왕은 아랑의 편지를 읽고 더욱 그녀를 자기 손아귀에 넣고 싶었다. 그러나 연약한 여인을 군사를 시켜 잡아오라고 하기에는 왕의 위신이 있는데다가 또 백성들의 웃음을 사기 쉬우므로 개루왕은 고심했다. 개루왕은 궁리끝에 궁궐을 짓고 있는 아랑의 남편 도미를 불러 들이기로 했다. 개루왕은 도미를 불러 놓고「네 아내가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라지」하는 이 말에 도미의 가슴은 섬뜩했다. 「잘못 전해진 이야기로 알고 있습니다.」「범절이 바르고 지조가 굳다지」「…」「여인은 정절이 으뜸가는 것이 미덕이지만 나는 절개가 굳은 여자는 한번도 본 적이 없어. 더우기 미인일 수록 유혹에 빠지지 않는 여인이 없으니 네 아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하고 개루왕은 빙글빙글 웃으며 도미를 내려다 보았다. 이에 젊은 도미는 왕의 모욕적인 말에 당황하고 흥분했다. 왕보다 더 깨끗한 아랑에 대해 애매한 누명을 씌우는 것이 분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소인의 아내같은 사람은 죽어도 두 마음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는 도미가 평소 아내를 믿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신있게 말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도미의 아내에 대한 자신있는 말은 도리어 왕의 불순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개루왕은 도미의 아내가 얼마나 아름답고 청결한지를 실제로 시험해 보고 싶었다.
도미에게는 궁중의 일을 맡겨 머물게 한 다음, 사람을 시켜 도미의 집에 왕이 거동한다고 알리고 군신을 시켜 왕의 용표를 입게하여 도미의 집으로 보냈다. 그리고 아랑의 정조를 시험하게 하였다. 드디어 왕의 위의를 갖춘 가짜왕이 밤에 도미의 집에 도착하여 그 아내를 불러 「내가 너의 아름다운 모습을 전해듣고 그리워한지 오래 되었다. 오늘 내가 도미와 내기장기를 두어서 내가 이겼기 때문에 내일 너를 궁중으로 데려가게 되었다. 지금부터 너는 내 여자이니 나를 따라야 하느니라」하면서 동침을 강요하였다. 도미의 아내 아랑은 의외의 일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마음을 가라 앉히고 「임금님께서는 거짓말이 없는 일입니다. 제가 어찌 따르지 않겠읍니까?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안으로 들어가소서. 제가 의복을 갈아입고 들어가겠습니다.」하면서 가짜왕을 방안으로 안내한 다음 한 여종에게 옷을 단장하여 입혀 들여보내서 하룻밤을 지내게 하였다. 슬기있는 아랑은 기지를 써서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튿날 이 사실이 알려지자 개루왕은 크게 노하여 도미에게 죄를 씌워 그 벌로 두 눈을 빼고 송파강으로 끌고 나가 작은 배에 실어 홍상으로 띄어 보냈다. 한편 아랑은 여종을 방에 들여 보낸 후 바로 집을 나와 남의 처마 밑에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날이 밝자 궁궐을 짓고 있던 도편수에게 남편의 안부를 알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궁중에 들어갔다 나온 도편수는 하늘이 무너지는듯한 소식을 들려 주었다. 아랑은 이 말을 듣고 실신했다. 다시 정신이 들자 아랑은 도미를 찾아 송파나루로 쫓아갔다. 그러나 도미의 소식을 묻는 바람에 아랑은 개루왕이 배치해 놓은 군사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끌려온 아랑을 보고 개루왕은 「네가 네 죄를 알겠느냐?」언성을 높이면서 도미가 중죄로 처벌된 사실을 알리고 아랑에게 궁중에 들어와서 궁인이 될 것을 명했다.
아랑은 참으로 눈앞이 캄캄하고 정신이 아찔할 뿐이었다. 아랑은 개루왕에게 「왕명을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주인 잃은 몸이 의지할 곳이 없으니 어찌 혼자 살아가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염려하지 마소서. 다만 지금은 몸이 깨끗하지 못한 때이오니 며칠만 기다려 주시면 몸단장하여 들어오겠습니다.」라고 말하니 왕은 의심없이 내보냈다. 아랑은 자기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면서 송파강가로 나가 호천통곡하였다.
그러나 홍강에는 물결이 일렁일 뿐 남편은 없었다. 이때 배 한 척이 상류에서 떠 내려와 그녀가 서 있는 언덕아래 머물고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랑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 배위에 올라탔다. 아랑이 배에 오르자 배는 강을 따라 흘러 내려갔다. 배가 닿은 것은 천성도라는 섬이었다. 지친 몸으로 섬에 발을 딛었을때 푸른 언덕위에 남편 도미가 있었다. 서로 알아본 두 사람은 얼싸안고 울었다. 다시 배를 타고 내려가서 고구려 땅 산산(蒜山)아래 이르러 여생을 단란하게 보냈다. -
현재 석촌동 고분이 있는 지역 일대를 진텃벌(陣墟坪)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병자호란 때 청군이 남한산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진을 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진텃벌에는 이 당시에 있었던 애절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청의 침입이 임박하여 전운이 감돌고 있을 때, 당시 이참판 부인의 생일을 맞아 고관 부인들이 모여 생일축하를 하고 있었다. 생일축하연의 화제는 청국과의 전쟁 이야기였다.
즉, 청나라 되놈들이 정묘호란 때처럼 다시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고 한쪽은 백마산성에서 임경업장군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데 쉽게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들 하였다. 「금수 같은 놈들이 서울까지 쳐들어와 사람들을 죽이고 끌고 갈 것을 생각하니 통 잠이 오지 않아요」 이때 조용히 듣고 있던 이참판 부인이「만약에 되놈들에게 잡혀서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해 버리지요」하고 말하자 모든 부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절을 위해서는 목숨을 불사하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러자 오직 김류의 부인 유씨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이참판 부인은 「부인은 만약 되놈들에게 잡히면 어떻게 할 작정이지요」하고 묻자 유씨 부인은「그때 가봐야 알겠지요」라고 태연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유씨 부인의 말을 듣고 이참판 부인은 그녀를 부정한 여자라고 크게 꾸짖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염려했던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청군은 임경업 장군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서울로 침입하였고 인조 임금은 강화도로 피신하려다가 청군이 양천강을 차단하였다는 보고를 듣고 어가를 돌려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한편 도성에 침입한 청군은 갖은 약탈을 자행하였다. 특히 젊은 여인이 눈에 뜨이면 무조건 잡아갔다. 그리하여 어미는 잡아가도 어린이들은 버려두었으므로 굶고 얼어 죽은 어린이가 많았다.
이참판 부인과 유씨부인도 피난 가지 못하고 청군에 사로잡혀 진텃벌에 끌려왔다. 이때 이참판 부인은 의외로 청군의 위협과 회유에 굴복하여 정절을 꺾었으나 유씨부인은 끝끝내 정절을 지키다가 이곳 진텃벌에서 무참히 화를 당했다고 한다. -
남한산성에 가면 삼학사(三學士)의 정문(旌門)인 조그마한 집이 있어요. 그 삼학사가 누구냐 하면, 윤집, 홍익한, 오달제죠. 이 삼학사가 그러니까 만주로 두 왕자가 볼모로 잡혀가는데, 조정에서는 두 왕자를 잘 보호하라는 의미에서 담력 있고 지혜 있고 기지있는 사람들을 골라서 보냈던 거 같애요. 그때 만주에 가서 볼모 생활을 하는데, 거기 얽혀진 얘기입니다. 그 볼모로 잡혀간 왕자중에서 한명이 죽은 이유는 청나라에서 조선왕조의 대를 못 잇도록 씨를 없애야 되겠는데, 자식을 못 낳도록 하는 방법으로는 병에 걸린 여자랑 같이 자게 해 가지고 자식을 못낳도록 했던거 같애요. 그래서 효종의 형은 국내에 돌아오자마자 죽게 되었죠.
그리고 그 죽은 세자 동생이 나중에 효종이 되겠습니다마는, 그 분은 강화조약을 맺은 다음에야 풀려나서 돌아왔지만 삼학사 세사람은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는 까닭에 한 상자 속에다 넣어 놓고 위에서 큰 톱으로 켜서 죽이는데 세 사람 이마 한 가운데로, 동시에 큰 톱날이 들어오는 거죠. 그때 오달제가 키가 제일 작았던 거 같애요. 윤집이가 키가 컸던지, 키가 큰사람이 먼저 당할 꺼 아닙니까? 이마에 피가 흐르기 시작하자, 얼굴을 찌프리니까 오달제가 “왜, 나라에 충성하기 위해서 죽는데, 뭐가 두려워서 찌프리느냐? 떳떳하게 죽어라.”하고 소리를 쳤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차차 앉은 키대로 톱날에 죽는데 오달제가 제일 나중에 톱날이 닿는데 자기도 얼굴에 피가 흐르니까 찡그리더라 하는 얘긴데, 그렇게해서 세 사람이 죽었다는 거죠. 봉림대군이 나중에 효종이 되어 만주에서 풀려나 돌아올때 세사람의 충정이 가상해서 “거기 윤집이 있느냐?” 하자 공중에서, “예. 신 여기 받들고 따라갑니다.” 하고 “달제 있는냐?” 하니까는 “예. 소신도 따라갑니다.”해서, 그 서울 도성문을 들어서면서 또 부르니까는, “예. 소신들은 여기까지 잘 받들어 모시고 따라 왔습니다.
이제 소신들은 정처없는 곳으로 사라져 가겠습니다. 국태민안(國泰民安) 하시기를 비옵니다.”하고서는, 그 다음부터 소리가 없더라는 거야. 그리고 때때로 그 대군이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삼학사들이 미리 나타나 예고해 주는 현몽(現夢)을 하는데 하루는 대군께서 “너희들이 이렇게 공중에 떠다녀서는 안되겠다. 국기(國其) 곁의 사직단(社稷壇)에 받아 주랴 아니면 어찌하면 좋겠느냐?” “아니올시다. 한(恨)은 남한산성을 끝끝내 지키지 못한 것이 소신들의 한이올시다.” 해서, 그 남한산성에다가 삼학사의 넋을 모시는 묘(廟), 사당을 세워주고 그 혼을 거기다가 모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
강남구하고 송파를 가르는 개천이 바로 탄천(炭川)이야, 탄천은 우리 말로다가 숯내라는 뜻인데,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장장포니 검내니 험천이니 이렇게 부르고들 있어요. 이 개천은 경기도 용인군 부석면 중리 석행산에서 발원해서, 용인 서쪽에 이르러 장장포라고 부르고, 다시 광주산을 지나 꺾이면서 북쪽으로 흘러 광주군 남석면에 이르러 기우제를 지나는 하천을 검내, 또는 험천으로 불러요. 탄천, 또 검내 이렇게 부르게 된 연유가 다 있어요. 조선시대 강원도 등지에서 목재와 땔감을 한강을 통해 싣고 와가지고서 뚝섬에서 부려 놨는데, 이걸 가지고 숯을 만든 곳이 바로 탄천 부근이고 그래서 개천물이 검게 변했다고 하는 것이야.
그리고 또 탄천에는 이러한 재미있는 전설도 전해내려오고 있어요. 에. 그러니까 옛날에 염라대왕이 사자에게, “삼천갑자를 사는 동방삭을 잡아오너라”라고 명을 내려 광주 땅으로 내려왔는데 동방삭을 찾을 길이 있나!
그래서 한가지 꾀를 생각해냈어요. 그것이 뭐냐하면 말야. 이 세상에서 아무도 하지 않는 짓을 하고 있으면은 그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많고 객기 있는 동방삭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숯 몇 덩이를 들고 아침부터 숱내에 나가서 냇물에다가 숯을 씻기 시작했던 거야. 보는 사람들이 모두 그걸 보고 비웃었어요. 염라대왕이 보낸 사자는 비웃거나 말거나 매일같이 계속해서 똑같은 짓을 되풀이 하고 있었대요. 그런데 어느날 노인이 지나가다가 그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며 “으응, 이 사람이 바로 숯을 냇물에 빨고 있는 그 미치광이로구만.”하면서 그 행동을 한참 동안 구경을 하다가는 발길을 돌리면서,“허허, 정말 별일 다봤다.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어도 냇물에 숯을 빠는 놈은 처음봤다니까.”이러는거야. 그러니 이 염라대왕이 보낸 사자가, “옳거니. 임자가 바로 삼천갑자 동방삭이로구나.”하면서 동방삭의 소매를 꽉 잡아버렸대요. 그렇게 염라대왕의 사자가 삼천갑자 동방삭을 잡아갔다고 해서, 숯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하는거예요. -
인조(仁組) 14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청군(淸軍)의 공격을 피하여 인조대왕(仁組大王)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을 가던중 이곳에 도착하여 보니 작은 냇가가 있었다.
신하들은 임금을 섬겨야 한다는 충성된 마음으로 주억돌을 주어다 징검다리를 만들고 인조대왕(仁組大王)이 무사히 냇가를 건너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후부터 이다리는 주억돌을 주워다 놓았다고 하여 '주억다리'로 불리워졌다. 다리는 없어지고 그 유래만 전하여 지고 있었는데 송파구에서는 방이동 205-5(남부순환로변 시설녹지대)표석을 설치하였다. -
어떻게 해서 송파산대가 생긴 것인고 하니 옛날에 수도가 개성에 있었대요. 너무 북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한가운데인 한양으로 끌어냈대요. 지금의 서울로 말입니다. 한양으로 수도를 삼고 대궐을 짓고 성을 쌓고 임금님이 살아보려니까, 지금은 없지만 그때는 도깨비, 허깨비 뭐 별별 귀신이 많았었대요. 그래 밤이면 상감마마님께서도 잠을 잘 수 없어서 도로 개성으로 갈 까도 생각을 하다가 조선의 학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사실은 이렇게 돼서, 내가 도로 개성으로 가게 되었다.”하니까. 그 학자들이 모두 도깨비를 쫓기위해 문제를 낸 것이 어떻게 낸고 하니, “귀신을 어떻게 하면 쫓을까?”그래서, 무당이라는 것도 만들어 놓고 또 장님 경 읽는 것도 만들어 놓고 또 송파산대놀이 12마당을 만들어 귀신을 쫓는 거예요. 이 산대놀이의 첫마당에는 첫상좌 둘째상좌, 둘째마당에는 옴중, 세째마당에는 양반인 연닢과 눈끔쩍이, 그러고 그렇게 해가지고 12마당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탈춤은 껑충껑충 뛰면서 춤을 많이 추는 것이고, 산대놀이는 여러 가지 재담이 많이 들어 있어요. 그전에 이 송파에는 큰 장이 섰는데 수만명씩 모였어요.
안내사항구술자 : 고 한유성(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 송파산대놀이 인간문화재), 서울민속대관 6편(구전설화편, 1994, 서울특별시) 발췌